27년 테제
27년 테제(일본어: 27
배경
1924년 제1차 일본공산당이 해산했다가 1926년 제2차 일본공산당이 재건되었고, 그 이듬해 새 집행부(토쿠다 큐이치, 후쿠모토 카즈오 등)가 모스크바를 방문했다. 이 때 니콜라이 부하린이 주도하는 코민테른에서 27년 테제를 통보했다.
종래 제2차 일본공산당은 후쿠모토가 주장한 “천황=절대군주”(즉, 이런 의미에서 일본을 “근대국가”로 간주한 것)론과 급진적 2단계 혁명론인 후쿠모토주의를 지지하는 논조가 압도적 다수였다. 부하린은 후쿠모토의 논조를 면전에서 정면부정하고 후쿠모토, 토쿠다 등을 중앙위원에서 해임했다. 이후 코민테른에서 일본공산당 측에 일방적으로 정해 준 노선이 27년 테제다.
골자
- 일본은 반봉건적 국가이며, 근대국가로서 성숙했다고 말하기 어렵다
- 군주제 폐지 (천황제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32년 테제)
- 일본공산당은 당분간의 목표로 부르주아 혁명을 지향한다.
- 단, 그 혁명이 일어날 때 헤게모니는 무산자, 농민이 취하는 것으로 한다.
영향
일본공산당은 27년 테제를 받아들임으로써 후쿠모토주의에 의해 뒷받침되던 독자성을 포기했다. 후쿠모토는 실각해서 다시는 당권파가 되지 못했다. 이 때 일소당한 후쿠모토파 간부들은 1928년 3·15 사건 이후 “노동자파”로 분열해 나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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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전전)일본공산당
(1921/22년-1924년)
당간부 |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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강령・테제 등 | |
당대회 | 당창립대회 - 2회당대회 - 임시당대회 |
사건 | 효민공산당 사건(결당 전) - 극동제민족대회 - 제1차 일본공산당 검거사건 |
(1924년-1926년)
강령・테제 등 | 상해 테제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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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건 | 오타루 고상 군사교련 사건 |
(1926년-1929년)
당간부 |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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강령・테제 등 | 27년 테제 |
당대회 | 3회 당대회 |
사건 | 3·15 사건 - 4·16 사건 |
분파・전향자 |
(1929년-1930년)
당간부 | 다나카 세이겐 - 사노 히로시 - 젠노 젠시로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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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건 | (신)노농당 해소문제 - 카와사키 무장메이데이 사건 |
분파・전향자 | 「해당파」 - 전협쇄신동맹 |
(1931년-1932년)
당간부 | 가자마 조키치 - 이와타 요시미치 - 곤노 요지로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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강령・테제 등 | 31년 정치테제 초안 - 32년 테제 - 강좌파 |
사건 | 스파이M의 지도부 잠입 - 눌렌스 사건 - 윤기협 사살사건 - 당간부 탈환계획 - 적색깡패 사건 - 아타미 사건 |
(1933년-1935년)
당간부 | 야마모토 마사미 - 노로 에이타로 - 미야모토 겐지 - 헨미 시게오 - 하카마다 사토미 - 아키사사 마사노스케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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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건 | 고바야시 다키지 학살 - 노로 에이타로 고문치사 - 사노・나베야마 전향성명 - 일본공산당 스파이 사문사건 |
분파・전향자 | 「일국사회주의」그룹 - 다수파 |
(1935년-1945년)
당 재건운동 | 일본공산주의자단 - 게이힌 그룹 - 한신 그룹 - 관서지방위원회 - 이토・하세가와 그룹 - 가미야마 그룹 - 일본인민해방연맹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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인물 | 가스가 쇼지로 - 가스가 쇼이치 - 기시모토 시게오 - 이토 리쓰 - 가미야마 시게오 - 고바야시 요노스케 |
강령・테제 등 | 일본의 공산주의자에의 편지 - 인민전선 |
사건 | 요코하마 사건 - 조르게 사건 - 키리시마 사건 |
일본공산청년동맹(공청) - 일본노동조합평의회(평의회) -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(전협) - 전국농민조합전국회의파(전농전회파) - 학생연합회(학련) - 전일본무산자운술연맹(납푸) -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(콥푸) - 프롤레타리아과학연구소(프로과) -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- 전국수평사청년동맹 - 대만 공산당 - 노동농민당(노농당) - 일본적색구원회 - 산업노동조사소
『무산자신문』 - 『적기』(잡지) - 『전위』(잡지) - 『마르크스주의』(잡지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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